지성(오성)과 감성(오감)의 상호작용
-좌.우뇌의 상호작용(창의적 인간)
칸트는 지성(오성)과 감성(오감)의 상호작용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눈앞의 ‘사과’를 오감을 통해서 냄새를 맡고 만져봄으로써
들어온 정보를 범주에 넣어 사과를 인식하게 된다.
칸트가 말하는 범주란
사과를 ‘공간’적으로 동시(同時)에 배열하고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것이다.
이 또한 예를 들어보면
감각적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이
좌뇌는 세부 사항을 보고 우뇌는 전체를 본다.
그래서
좌뇌 중심적인 서양화는
대상이나 풍경을 아주 세밀하게 세부적으로 표현 하지만
우뇌 중심의 동양화는
산과 집, 그리고 들이 전부 어우러지는 전체를 담는 그림을 그린다.
따라서
좌뇌는 순차적 배열이 강하고 우뇌는 공간적 배열이 강하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감성만으로 인식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기때문에
감성적으로 받아들인 그 대상을 지성으로 판단하고 추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성만으로 대상을 인식하면 실수를 저지를 수 있고
지성만으로 대상을 인식한다면 딱딱하고 무미건조해질 수 있다.
∎‘이성’의 절대성이 갖는 한계 때문에 윤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성’의 절대성만을 믿어서도 않된다.
‘이성’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대상이 분명히 존재한다.
‘시간’상으로 시초가 있고 ‘공간’상으로 유한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시간의 시초도 없고 공간의 유한이 아니라 무한한 것도 있다.
이성은 “시초도 없고 무한한 것”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이성은 이런 한계를 갖고 있는데 이런 한계 때문에 행동하는 데는 윤리 법칙이 필요하다.
칸트의 윤리법칙
칸트의 윤리 법칙은 “인간을 수단으로 보지 말고 목적으로 보자”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람 그 자체로 보자는 것이다.
상대방이 나의 욕구 충족의 대상 즉, 수단이 되어서는 않된다.
남녀간의 사랑이 서로가 서로에게 욕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한다면
그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여자는 상대방 남자를 자신의 돈벌이의 수단으로 본 것이고
남자는 자신의 성적욕구의 수단으로 여자를 돈을 주고 하루 밤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는 숭고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짐승같은 생리적 욕구의 발현만 있을 뿐이다.
성폭행
역시
그 여자를 수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짐승에게는 윤리가 없다. 정욕만 있을 뿐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녀야할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Platon은 위대한 사상가이다.
“동굴의 비유”를 통해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그의 생각이
kant의 윤리사상에 영향을 준 것이다.
∎칸트가 현대인에게 주려고 하는 메시지 무엇일까?
칸트의 사상을 이해하여 지혜를 담아내는 작업을 해보자.
첫째.
우리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도록 준엄한 명령을 내렸다.
칸트의 정언명법(定言命法)이 그것이다.
시내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된다.
자기도 피곤해서 자리 양보를 하는 것이 싫지만
“노인을 공경해야 한다”라는
도덕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Kant의 정언명령 중에 하나로서
내면적 선의지를 중시한 의무론적 윤리설에 따른 행동이다.
Kant는 모든 인간이 목적의 주체로서 공존하는 사회 체제를 강조한다.
정언명법의 종류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정언명법(자신의 행위의 준칙이 모든 사람에 대한 보편적인 법칙이 되라)은
남의 입장에 서서 행위하라(역지사지:易地思之)는 것이고
두 번째 정언명법(사람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은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첫 번째 정언명법은 공정성의 형식적 원리이며
두 번째 정언명법은 인간을 목적적 존재로 간주하라는 내용상의 원리이다.
Kant의 정언명법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다.
즉 어떤 도덕도 상대적이고 주관적이어서는 안 되고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준칙을 정했다면
‘너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처럼
확대해 보아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준칙이 성립되어 보편적 법칙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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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가언명법(假言命法)은 올바른 윤리가 될수 없다.
“네가 이렇게 해주면 내가 널 더 좋아할께”는 올바른 것이 되지 못한다.
사랑 그 자체를 즉, 사랑해 주면 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보다 그 상대방을 더 사랑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숭고하고 고귀한 사랑이다.
둘째,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판단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경험만으로 인식하는 것은 정당한가?
경험적인 것은 실증적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만의 감각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실수 투성이의 판단이 된다.
절대 변하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변한다.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과의 사랑을 살펴보자.
사랑은 지성(머리)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에
감성(가슴)이 없는 사랑은 허무하다.
감성이 빠진 지성만으로의 사랑은 공허하고 지성이 없는 감성만의 사랑은 맹목적이 되어 버린다.
우리가 무엇 인가를 판단해야할 때(이별 등)
어느 한 면만으로 인식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