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친아•엄친딸을 거부한다.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는
서로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오리_다리와 #학의_다리는 그 길이가 서로 다른데
서로 비교를 합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누구는 어떤데 누구는 그렇더라” 식으로
비교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비교는 갈등을 초래하고 그 가정과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장자는 “외편 第8篇(제8편) 騈拇(변무)”에서
인위적인 행위에 대해서 거부를 합니다.
그래서 학의 다리 일부를 잘라서 오리 다리에 붙인다고
오리와 학이 길이가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학은 학대로, 오리는 오리대로 #절대평등을 갖고 있습니다.
장자의 道는 Post Modernism적 사유입니다.
#장자에게 있어 道란
위의 예에서 본 바처럼
이것과 저것의 절대 대립(학의 다리와 오리 다리)이
사라진 것을 도라고 봅니다.
따라서 道의 경지에서 보면 ‘너와 나’가 없습니다.
‘너와 나’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차별이 생기게 됩니다.
21C 다문화 사회에서
‘다름’은 마땅히 인정받아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 개성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제물(齊物)은 Holistic 교육(화쟁사상)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상세계의_분쟁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세상의 한 면만을 바라보고
자기 것이 절대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기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의 동굴에서 벗어나(Platon의 동굴의 비유)
어느 것이 더 옳다고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물은 #Holistic 사유입니다.
정신세계에 갖고 있는
‘나와 너’의 #대립[쟁(諍)]을
해소[화(和)]하는 것이
Holistic인 것입니다..
다음은 장자의 자연사상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남해의 임금을 숙(儵), 북해의 임금을 홀(忽),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혼이 혼돈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아서 그에게 보답을 하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눈, 코, 귀, 입 등의 7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살고 있는데 혼돈에게 만 없어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놓기 시작했다. 7번째 구멍을 뚫었는데 죽었다. <장자>내편, 응제왕 중에서 |
자연의 상태에 그대로 두었다면
죽지 않았을 ‘#혼돈’에게 인위적인 구멍을 뚫어 줌으로써
말 그대로 혼돈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자연성을 파괴하는 순간
우리는 혼돈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
첫째는 #좌망(坐忘)과_심제(心制)입니다.
좌망이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비교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 상황을
마음속에서 깨끗이
비워 버려야 합니다.
이 깨끗이 비워 버리는 것을 심제라고 합니다.
좌망과 심제를 하면
그러면 마음의 동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고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는 동안
마음의 상태는 깨지게 됩니다.
그러면 병이 들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병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healing,
저기서도 healing입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상대방을 병들게 하지는 않을까를
걱정해야 합니다.
둘째는 #물아일체(物我一體)입니다.
다음은 물아일체의 예입니다.
꿈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았던 장주(장자의 본명)는 꿈에서 깨어 난 뒤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로 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장자>내편의 “제물론”중에서 |
이는 ‘#호접몽(胡蝶夢)’으로서
‘장자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좌망과 심제를 하면
너와 나는 하나가 됩니다.
이럴 때 인격적인 만남(M.Buber)이 이루어집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이 아닌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物(물: 상대방)과 我(아: 나)의 하나 됨(一體)은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입니다.
어떤 곳에서든지
상대방을 ‘너’가 아닌 ‘그것(ES)’으로 본다면
참된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솔한 대화가 나올 수 없습니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와 사용자 간에 서로를 ‘그것’으로 여긴다면
서로서로를 이용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대화만을
유도하게 됩니다.
‘나와 너’는 어느 것이 더 우울하고 열등한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 비교의 접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갈등도 없게 됩니다.
여기서 진정한 ‘#이해(Verstehen)'가 이루어집니다..
이해가 바탕이 될 때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