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자의 삶의 지혜
노자는 사회가 혼란하고 무질서한 이유를 인간이 사물의 겉모습에만 이끌려서 잘못된 인식과 가치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는 사람들의 겉모습이나 배경으로 특정 사람에 대해 그릇된 인식과 편견을 갖는다. 이런 잘못된 판단을 중지해야 한다(Epoche).
진정으로 사람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 사람의 본질을 직관해야 한다. 즉, 그 사람에 대해서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다”라는 식의 개념의 옷을 입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갖고 있는 인위적인 관념들을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은 일류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매너도 좋을 것이고 인성도 좋을 것이다”라는 인위적인 관념을 제거해야 한다. 이처럼 잘못된 인식과 가치관을 갖는 이유는 인위적인 사회제도 때문이고 그로 인해서 우리가 갖고있는 순수한 자연의 덕이 훼손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노자의 핵심 사상이다. 노자가 걱정하는 것은 이런 거짓된 인식-이를 위(爲)라고 한다-으로 인해서 혼돈스럽고 어지러운 세상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자연”은 발현될 수 없다.
자연이란 ‘自(스스로) 然(그러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절로 그러함’에 어긋나면 그 본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물의 본성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인위적인 행위를 가했을 때 물은 우리에게 반격을 가한다. 이처럼 아이들의 자연성을 해치게 되면 그 아이들도 우리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비행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노자는 이상적인 삶을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상선약수(上善若水)로 본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란 순수한 자연에 인위적인 가식과 위선의 행위를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본래의 자기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란 가장 으뜸이 되는 善(좋은 것: the good)은 물과 같다고 본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는 것으로 ‘가장 선한 것은 물과 같다’라는 뜻 이다. 지는 것이 이긴다는 것과 같다. 물이 그러하다. 물은 무위 자연적 삶의 모범적 형태이다. 이런 자연을 지킬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 질 수 있다. 물처럼 살아가야 한다.
2) 장자의 사상 - 엄친아•엄친딸을 거부한다.
장자는 세상이 어지러운 이유에 대해서 인간이 서로 비교를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예를 오리 다리와 학의 다리 비교를 들어서 설명한다. 오리 다리와 학의 다리는 그 길이가 서로 다른데 학의 다리 일부를 잘라서 오리 다리에 붙인다고 오리와 학이 같아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장자의 도(道)는 Post Modernism적 사유의 발로이다.
장자에게 있어 道란 위의 예에서 본 바처럼 이것과 저것의 절대 대립이 사라진 것을 도라고 본다. 따라서 道의 경지에서 보면 ‘너와 나’가 없다. 너와 내를 비교하는 순간부터 차별이 생기게 된다.
차별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모두 개성은 다르다. 그 개성의 조화로움을 통해 하나가 되어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자의 도는 Post Modernism적 이다.
그 사상을 “제물”에서 살펴볼 수 있다. 제물(齊物)은 Holistic (원효의 화쟁사상)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상세계의 분쟁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세상의 한 면만을 바라보고 자기 것이 절대 보편타당하다고 주장하는 이기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동굴에서 벗어나(Platon의 동굴의 비유) 어느 것이 더 옳다고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물은 Holistic(하나 됨) 사유이다. 정신세계에 갖고 있는 나와 너의 대립[쟁(諍)]을 해소[화(和)]하는 것이 Holistic인 것이다. 장자의 자연은 다음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남해의 임금을 숙(儵), 북해의 임금을 홀(忽), 중앙의 임금을 혼돈(混沌)이라 한다. 숙과 혼이 혼돈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아서 그에게 보답을 하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눈, 코, 귀, 입 등의 7 구멍이 있어 그것으로 살고 있는데 혼돈에게 만 없어 하루에 하나씩 구멍을 뚫어 놓기 시작했다. 7번째 구멍을 뚫었는데 죽었다. <장자>내편, 응제왕 중에서 |
자연의 상태에 그대로 두었다면 죽지 않았을 ‘혼돈’에게 인위적인 구멍을 뚫어 줌으로서 말 그대로 혼돈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갖고 있는 자연성을 파괴하는 순간부터 혼돈 속에서 방황하게 된다. 따라서 장자가 제시하는 이상적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은 좌망(坐忘)과 심제(心制), 물아일체(物我一體)이다.
좌망(坐忘)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을 잊으라는 것이다. 심제(心制)는 일체의 비교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 상황을 마음속에서 깨끗이 비워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의 동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비교하고 서로에게서 상처를 받는 동안 마음의 평정 상태는 깨지게 된다. 그러면 병이 든다. 우리 사회는 병이 많이 들어있다. 그래서 여기서도 healing, 저기서도 healing이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사람들을 병들게 하지는 않을까? 정말 우리 자신들부터 마음의 병을 치료해야 한다.
물아일체(物我一體)는 다음의 예에서 볼수 있다.
꿈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았던 장주(장자의 본명)는 꿈에서 깨어 난 뒤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로 변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장자>내편의 “제물론”중에서 |
이는 ‘호접몽(胡蝶夢)’으로서 ‘장자와 나비’는 하나라는 것이다. 교사와 학습자는 하나이다. 좌망과 심제를 사면 너와 나는 하나가 된다. 이럴 때 인격적인 만남(M.Buber)이 이루어 진다. ‘나와 그것’의 만남이 아닌 ‘나와 너’의 만남을 통해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 질 수 있다.
物(상대방)과 我(나)의 하나됨 (一體)은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교육현장에서 학생을 ‘너’가 아닌 ‘그것(ES)’으로 본다면 참된 인격적인 만남이 이루어 질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진솔한 대화가 나올 수 없다. 산업현장에서 노동자와 시공자간에 서로를 ‘그것’으로 여긴다면 서로서로를 이용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인 대화를 유도할 것이다. ‘나와 너’는 어느 것이 더 우울하고 열등한 것이 아니다. 서로 비교의 접점이 없다. 따라서 갈등도 없게 된다. 여기서 진정한 ‘이해(Verstehen)'가 이루어진다. 이해가 바탕이 될 때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